hello, stranger?
나의 키보드 방랑사 | Hanashi | 2019-07-15 12:54

1. 나는 왜 작은 키보드를 사용하려고 하는가.


내가 처음 고가의 키보드를 사용해본 것은 중학교 2학년 쯤이었다. 컴퓨터 가게를 하는 수학 선생님에게 좋은 키보드를 구하려고 한다, 고 했더니 추천해주신게 아론 104? 101? 키 키보드다. 아마도 한영키/한자키가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는 것을 보면 104키였을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사용했던 대우통신 프로 엘리트 8088 의 XT 키보드도 기계식이었을 테지만, 번들 키보드였으니 논외로 하자. 아무튼 좋은 키보드였다. 지금의 체리 청축보다 약간 하이톤의 경쾌한 클릭음을 내는 그 키보드를 사용하면서, 사실 스위치라던가 그런 거에 대해서는 불만은 없었지만 별로 사용할 일이 없는 숫자 패드는 없으면 어떨까? 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톱으로 써는 생각도 해보았으나 분해해 본 결과 썰면 안되는 것으로... 음...

그렇게 시간이 흘러 IBM 노트북을 사용하면서 또다시 노트북 키보드를 데스크탑에 사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시절은 바야흐로 초고속 인터넷의 태동기, 인터넷을 잘 찾아보니 IBM 에 이미 그런 물건이 있었다! IBM 에도 나같은 괴짜가 많았나보다! 일명 울트라 나브, 이렇게 생긴 물건이다. 이 울트라 나브라는 명칭은 정식 명칭은 아니나, 통상 IBM 의 노트북 키보드와 동일한재활용 레이아웃을 가진 키보드를 울트라 나브라 부른다.


사실 이전에 스페이스 세이버라 불리는 모델도 있었지만 당시의 나로선 구매할 방법도, 능력도 없었다.

한동안 이 울트라 나브를 잘 사용하고 있다가, 아래쪽의 터치패드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실제로 써보면 좀 불편하다. 팜 레스트 가운데 위치해서 걸리적거리기도 하고, 당시엔 편리하다고 생각했던 트랙포인트 - 일명 빨콩 - 도 디스플레이가 대형화/고해상도화가 되면서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G-H-B 키의 교차 지점에 있어 가끔 해당 키를 누를 때 트랙포인트가 같이 눌리는 경우도 있고... 해서 결국 몇몇 키의 펜타그래프가 부러졌을 때 새로운 제품을 사지 않고 잠시 멤브레인 키보드를 사용했다. 여전히 키패드 영역(텐키)는 거슬렸으나 술마시느라 돈이 없기도 했고, 당시엔 게임을 더 열심히 해서 마우스에 버닝하고 있기도 했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원기형이 갈축 포커(original) 키보드를 선물해주었다.


소위 말하는 60% 키보드다. (61키) image source : https://deskthority.net/viewtopic.php?t=125

이 녀석의 특징은 기계식 스위치를 사용한 키보드, 그리고 작다. 텐키가 없다. 그런데 당시의 나는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던 터라 방향키는 필요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텐키가 없는 녀석이지 방향키까지 없는 녀석은 아니었다. 한동안 이 키보드는 백업이랄까... 상시 사용하는 키보드는 아니...었으나, 어느날 애플에서 매직 트랙패드 라는 걸 내놓았다.


이건 혁명이야... 아아 잡스 횽님... ㅠㅠ

매직 트랙패드를 쓰면서 104키 레이아웃의 키보드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두 입력 기기간의 거리는 나로 하여금 포커 키보드를 메인 키보드로 사용하게끔 만들었다. 엔터 키를 누른 후 매직 트랙패드까지 내 손을 옮기는데 소요되는 방향키와 텐키의 너비는 인천공항발 리우데자네이루행 직항기의 비행 거리보다도 멀었다. 그렇다고 트랙패드를 포기할 수도 없다. 난 트랙패드 없으면 인터넷도 못해... ; ㅁ; 결국 나는 매직 트랙패드를 사용하기 위해 방향키까지 버리기로 마음먹고, 61키 키보드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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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포커 키보드에는 만족하는가.


기성품 기준 키보드의 사이즈는 이러하다.



전체 키보드는 풀 사이즈
파란 테두리는 84키 = 텐키리스
붉은 테두리는 61키 = 60% 사이즈 = 포커 레이아웃 으로 불린다. 나는 파란 테두리의 84키는 뛰어넘고 포커로 넘어왔다. 한동안 매직 트랙패드와 포커의 조합은 최강이었다. 스위치 고장나면 납땜 풀어서 교체하고, 색다른 느낌으로 esc 와 백스페이스는 청축으로 바꿔보기도 했다. 그런데 이 오리지널 포커 키보드에는 큰 함정이 있었다. ESC 키를 누르려면 Fn 키와 ~/` 키를 눌러야 한다. Fn 키와 Q 를 누르면 ESC 가 디폴트로 바뀌지만 ~/` 를 입력하려면 다시 Fn 키와 Q 를 눌러 고정을 해제해야 한다. 이건 뭐 ㅂ...

하지만 결혼 선물로 받은 물건이라 처분하려니 마음이 좋지 않아, mass drop (현 drop.com) 에서 ESC 가 디폴트인 키보드를 2개 사서 집/회사에 두기 전 까지는 열심히 사용했다. 한동안 이 레이아웃에 만족하고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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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없으면 만든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bash/vi 를 쓰는 입장에서 ESC 와 ~/` 키의 공존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키보드는 빨리 칠 수 있는데, 그 와중에 특정키를 사용하기 위해 Fn 키를 눌려야 한다니!? 돌사진 촬영에 단렌즈 3개 가져간 느낌이다. 어느 세월에 렌즈 갈아끼면서 촬영하는가. 메신저도 그렇다. 외쿡은 잘 모르겠는데, 한국어 메세징에서는 ~ 의 입력이 너무 많다. 이걸 키 한 개가 Fn 키의 도움(심지어 Shift 도 필요하다)을 받아가면서 처리를 해야한다.




세상에 물건은 많다. 하지만 내 마음에 쏙 드는 물건이 없다면 내가 만들어야한다. 그래서 만들기 시작했다.
포커의 레이아웃에 ESC 키를 가진 키보드. 사실 처음에는 ESC 만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F1-F12 도 있으면 좋겠다... 그래서 84키와 61키 키보드의 중간 어디쯤인 74키 레이아웃이 나왔다. 아래 링크는 프로토타입.
full wiring ... 포커 배열 키보드가 참 좋은데, ~ / ` / ESC 키를 조합해서 사용해야 하다보니 하나의 키에 기능이 3개가 할당되어 있어 불편했다. 사실 순전히 ESC 키 하나 때문에 만드는 것이다...만, F1-F12, 커스텀 펑션키는 덤으로 편...

기성품 PCB 를 사서 필요없는 부분을 톱으로 잘라내고 나머지를 저항으로 이어붙였다. 이래저래 작동은 하긴 했지만 저항의 갯수가 늘어날 수록 값의 구분이 모호해지기 시작했고 키가 꼬이는 현상이 발생했다. 아무래도 본격 업무용으로는 힘들... 그리고 개별 키를 모두 전선으로 주렁주렁달았더니 유지보수가 너무 힘들어졌다. 하지만 할 수 있다는 건 알았다. 여기까진 그냥 가능성의 영역이었다.

PCB 가 기성품인데 내가 이걸 최대한 활용해야한다는 사실에 지쳐가다보니, 결론은 드럽고 치사해서 내가 PCB 를 만들고 만다응?로 이어졌다. 키의 입력을 구분하는 방법도 단순한저항값 구별법에서 pullup 을 이용한 반쯤 디지털로 바꾸었다. 이를 위해 캐드를 익혔다. 2주 정도 걸렸던 것 같다... 알리 익스프레스의 PCB 업자를 통해 PCB 를 발주했고, 몇 번인가 실패한 PCB 를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렸다.

그리고 결국 완성했다.



높이가 좀 높지만 rev.3 에서 수정될 예정이다.

PCB 와 컨트롤러를 연결하는데 듀퐁 커넥터를 썼는데, 이 때문에 높이가 5mm 높아졌다. (키보드 높이 5mm 차이는 생각보다 체감이 크다.) 컨트롤러는 teensy 3.2 보드를 사용했다. (순정 아두이노 라이브러리에서는 미디어 제어키를 구현하기가 생각보다 귀찮다.) 그리고 macOS 기준으로 볼륨 조절키, 미디어 컨트롤키, LCD 밝기 조절(외장 모니터는 안되지만)도 모두 작동한다. 모든 키가 작동함을 확인하고 나서 1년 넘게 묵혀놓은 ergomix 키캡을 드디어 장착했다. 옆에서 보면 정말 예쁜 경사각이 나온다.


여기서 5mm 면 아래쪽 판 하나의 두께다. 이걸 제거하는게 목표다.

사이드 스텝도 다듬지 않았다. 필요한 작동이 완벽하게 됨을 확인했고 이 상태에서 rev.2 는 마무리할 생각이다. 물론 rev.3 도 준비중이다. rev3 에서는 듀퐁 커넥터를 모두 제거하고 teensy 3.2 보드를 PCB 에 다이렉트로 연결된다. 점점 설계가 손에 익어간다...




자 이제, rev.3 을 향해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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